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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헌·청송재

위 치 서울 종로구 계동 67-22
구 분 리모델링
용 도 단독주택 
대지면적 552.07 m2 지상층수 1
건축면적 264.46 m2 지하층수 1
건폐율 47.9 % 구조 목구조
연면적 304.13 m2 용적율 47.9 %
작품설명 능소헌
국민주택 규모의 한 아파트에 정착하여 12년을 꼼짝 않고 살아온 나는 70년대 말에 시작되어 80년대를 ‘광란의 부동산 투기 10년’으로 지새우는 주변의 경황들을 무심한 아웃사이더의 약삭빠르지 못한 눈으로 보아왔다. 왜냐하면 전용면적 24.5평의 콤팩트한 공간이란 것이 집사람과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 그리고 천사처럼 우리 살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한
분, 나까지 포함해서 전부 여섯 식구의 삶을 참으로 밀도있게 하여 주었기 때문이며, 그전의 셋방살이 두 번, 그 후 옮겨 살았던 대방 전철 역전의 17평형 전세 아파트와 비교한다면 그 당시 내 분에 넘치는 호화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자신은 남들처럼 집을 더 늘리려는 노력, 그 자체에 의미 부여조차도 하지 않았으며, 그대신 레코드판 한 장을 사들고 들어오
는 여유(?)에 흠뻑 빠지며 십수년을 보낸 것이다. 늘 우리 가난한 나라 살림에 이만한 집칸이라도 지녔으면 되었지... 하는 생각에서, 집 앞 우면산의 사계절이 변함없이 유리창 밖의 경치를 매해 신선함을 더해가며 바꾸어 주는 바람에 아이들 셋이 크는 것을 잊고 살아왔다. 아니 잊었다기 보다는 첫째 둘째 또는 막내를 번갈아 가며 이불 속에서 끌어안고 사는 재미를 분화된 공간에 아이들을 떠나 보내는 것 보다 더 살겨웁게 사랑한 듯 싶다. 좁은 공간 덕에 아이들과 부비며 생겨난 스킨쉽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고,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아이들이 그렇듯이 구김이 없고 예의바르게 큰 것도 다 가난이 가져다 주는 행복이라고 믿고 살아왔으며, 적어도 잘 산다는 것과 크다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았지 싶다.

강남 아파트의 생활공간이 점점 좁아져 커나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을 때 나는 늘 어렸을 때부터의 소망대로 강북 북촌마을의 한옥으로 이사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90년 7월 7일 계동 골목에 내놓은 집이 있다하여 집을 보러 계동 노뜨르담 수녀원 골목으로 들어섰다. 얼핏 골목 안쪽에 등나무가 무성한 집이 보였는데, 걸어가면서 떠오른 예감은 저 집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열린 대문 안쪽으로 한 여름에 아름답게 피는 능소화가 보이고, 곱게 늙으신 할머님 한분이 마당에 보였다.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고향 집에 온 느낌이 일시에 몰려왔다. 댓돌에 신을 벗고 대청마루 휠체어에 앉아 계신 주인 할아버님께 넙죽 큰절을 드리고 집을 구경시켜 주십사고 여쭙고, 집이 참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 같이 간 내자 얼굴 한번 흘낏보고 난 다음 모든일이 예정된 것처럼 순조로웠다.
주인어른께서 52년 동안 이 집에서 사신 내력을 한시간여 경청하고 난 뒤 우리는 좋은 집을 주셔서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드렸다. 노인장께서는 우리가 이 집에서 누려온 복도 모두 이어 받으라 축복하시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끝난 것이다. 집을 보고 나서면서 둘러 본 동네 또한 정감어린 것이어서 60년대에서 한치도 발전이 안된 모습 그대로 였다. 어물전이며, 길가에 늘어 논 수박덩이들, 오래된 한복점과 철지난 옷이 걸려있는 양장점과 수예점들, 강남의 각박함과는 거리가 먼 오래된 동네의 골목에서 느낀 유장함에 나는 즉시 매료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옥수리에 착수하였는데 한옥의 보존 보수를 하기 앞서 나는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건물에 간직된 모든 증거에 대하여 후에도 재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물질은 최대한 보존한다.
·보수부분의 색, 결, 외관과 짜임새 등이 조화되도록 하되 원재질보다 돋보이지 않게 꾸미는 한편, 고친 자리를 쉽게 식별할 수 있게 한다.
·가역적인 방법을 택하여 필요할 때는 보수전 원상태로 환원할 수 있게 한다.

즉, 기존 한옥의 용도변경이나 시대감각과 생활기능에 맞는 개조작업을 벌이며 수명의 연장과 사용도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측면에서 본다면 보수작업 이지만 디자인적 수법에 의하여 한옥건축의 특징은 보존되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계동 67-22번지의 능소헌은 상량된 종도리에 있는 신미년 유월 초파일(辛未年 六月 初八日)이라는 문헌으로 보아 일본 제국주의 한반도 강점하의 시기에 지어진 한옥이다. 집 배치는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행랑내지는 헛간으로 쓰였던 것 같은 익랑채(별채)로 구성되어 있는 서울지방형 배치구조의 한옥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합각이 있는 팔작지붕이며, 별채는 맞배지붕이다. 나무의 주재료는 춘양목(경북 춘양지방에서 나는 해송의 일종,껍질이 거북등 처럼 굵은 목재로 켜면 결이 곱다. 세월이 지나면 주황빛을 띤다.)을 섞어 썼는데 이 부분이 보수시 재료를 맞추기가 매우 힘든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평주(平柱)와 정록(淨綠), 출목은 춘양목이며, 주요 창호인 대청 덧창과 대문 역시 춘양목이다. 도리(道里)와 대청의 대량(大樑)은 홍송이다. 마당의 기단석과 댓돌은 홍제석보다 붉은색이 덜한 미아리석(종암동석이라고도 함)내지는 불암선석으로 보였다. 벽은 개조된 곳을 제외하고는 전부 흙벽치기를 하고 라스를 붙여서 회반죽 마감하였다. 간사이 기둥
은 주로 5치각의 홍송이며, 도리는 4치×3치가 주로 쓰였다. 방을 들어내보니 전부 구들장을 놓은 온돌로서 구들 판석 놓임이 매우 단아하고 정교하였다. 판석위에 새로 판넬히팅 파이프를 깔았다.
지붕의 기와는 구형(대형)이며, 안채 지붕의 용마루는 착고와 부고위에 5단 마루기와 쌓기를 하였고, 내림 마루와 추녀 마루를 당골막이 위에 3단 마루기와 잇기를 하였으며, 기와끝은 막새로 마감된 것이었다. 챙은 함석을 재료로 하였으나, 선홈통 모양이 정교하여 동판으로 교체시 같은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 중에 하나가 대청의 마루판이
었는데, 처음 마루판을 들어내고 약 30년전 괴목 문양판목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제대로된 괴목의 문양판목은 요즈음 흔히 보기 어려운 것이고, 시공 또한 빼어나게 정교한 것이기는 하나 전통 한옥의 대청 마루판 만큼 아름답지 않고 문양 자체가 다소 이질적인 것이어서 갈등이 많았지만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그밖에 창호는 구갑문이 안채로 주로 쓰여졌고, 사랑채는 변형된 아(亞)자 문이 주로 쓰였는데, 나중에 안채와 사랑채의 것은 살리고 별채의 것은 띠살문으로 새로 제작하여 달았다.


청송재 - 한옥의 부활과 복권
우리 식구가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틀을 잡고 보낸 10년을 뒤로하고 이곳 계동에 살림을 옮겨 잡은지도 벌써 10년째로 접어든다. 강북의 북촌마을에서의 우리 생활은 시류에 역행하여 아이들 셋을 그야말로 풀어놓고 산 셈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보다 신나게 놀고 자란 아이들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하며 우리 부부는 별스러운 둘만의 자랑으로 행복해하였다. 그만큼 계동터를 사랑하며 살아왔다.
한옥에 살다보면 한 템포가 늦어지게 마련이다. “느슨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삶의 느긋함은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한옥이라는 공간과 형태 때문일까, 아니면 시간의 흔적이 오랜동안 배어있는 이 북촌마을 동네가 가져다주는 안온함에서일까. 10년동안 문단속 걱정을 별로 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능소헌 한채만도 문짝이 240짝이 넘으니 일일이 잠글 수도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안빈락도(安貧樂道)라, 한옥의 방들은 비어있을수록 아름답고 사람이 돋보이기 때문에 딱히 소용에 닿지 않는 값진 물건을 들여놓고 전전긍긍해 본 기억이 별로없다.
아이들이 청소년기를 맞이하면서 능소헌의 30여평으로는 각방차지가 불가능해 진데다가 아래에 이웃하고 있던 계동 67-16 한옥이 수삼년 전부터 팔려고 내놓은 상태로 지속되다가 최근 갑자기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려왔다. 1992년부터 대책없이 해제해버린 북촌마을의 한옥 보존지구를 눈만 뜨고나면 간단없이 부수고 그 위에 임차료 손익계산이 바로 건물규모가 되는 세칭 집장수들의 다가구 주택이 우리 식구의 단란한 삶을 위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봄 우리 집은 가족회의를 하였다. 한옥에서의 삶을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빌라나 아파트로 이사갈 것인가. 사방이 4층 다가구 주택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한옥의 존엄성이 내리 짓밟히는 참담한 지경을 그대로 방치해 둘 것인가?
한참 후에 큰아이가 최종결론을 내었다. “저는 끝까지 한옥에서 살 겁니다.” 그 뒤 집사람과 나는 보험회사 중역으로 있는 친구에게 한옥 한 채를 수렁에서 건질 수 있는 자금을 기채해 주기를 부탁하였고 이어서 손을 보기 시작한 것이 능소헌 아랫채 청송재가 새로 탄생하게된 경위이다.
아랫채는 수십 년간 여러 세대가 세들어 산 집이어서 그런지 들보조차 천정에서 무너져내린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창틀이나 문짝 어느것하나 성한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옥은 최악의 빈사상태에서도 기둥과 창방, 대들보와 서까래 등 주요 구조부 몇 개만 온전하면 금새 되살아나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치로 미루어 알고 있는터라 곧 오래된 재목을 구하여 한옥을 되살리는 심란한 작업에 착수하여 5개월여 만에 작업을 마치고 입주하게 되었다. 첫날밤 나는 처음으로 한옥이 참으로 화사한 집이라고 느꼈다.

우리 조상이 옛날에 집을 지어 새로 입주할 때는 새나무에서 그윽한 솔향이 나고 이렇게 맑고 밝은색 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매우 새삼스러운 감회가 일었다. 매일같이 우리가 들여다 본 옛 고가들은 세월의 손때에 나무와 회벽들이 어둡게 퇴락하여 짙은 그늘속에 침잠해 있었던 것이다.

청송재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우리 식구 모두는 한옥의 찬란한 부활을 보는 것 같았다. 다만 창짝 문양을 프라이버시와 제작상의 하자를 줄이기 위하여 지나치게 복잡한 아자창으로 한 것이 결과적으로 흠이 되고 말았다. 적어도 대청의 문살만이라도 윗채 능소헌처럼 도톰한 두께가 있는 것으로 제작했어야 했다. 창호부분을 다시 한번 폄하하자면 속옷이 겉으로 나와버려 단정함이 없어진 것 같아 다시 손보아야 할 부분이 되고만 것이다. 한옥의 기품과 고즈넉함을 다시 담아낸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채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한 결과이다. 담을 손보면서 담높이에 대한 가족들의 의견은 대체로 이웃의 다가구 주택으로부터 오는 시선차단, 즉 프라이버시 보존 쪽으로 기울어졌다. 울안의 정경을 나눌 길과 이웃이 점점 사라져 한옥이라곤 봄날의 모란꽃처럼 오월 어느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놓여있는 슬픔 가득한 오늘의 현실 상황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한옥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후진집’ 바로 그것이다. 행정당국에서도 문화 역사적 가치는 도외시 한 채 현대의 삶을 온존히 담기에는 좀 뭣한 재개발 대상이 되고있는 불량주택으로 인식하고 있는것 같다.
TV 드라마에서도 대부분의 한옥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기는 장소로 부각되었다. 예를들면 한옥 마당에 놓여있는 수돗가는 언제나 시끌벅적지근한 입심 좋은 셋방살이하는 아낙들이 수다떠는 장소로 각인되어 왔다. 한옥의 문짝들은 언제나 드르륵하는 효과음을 내어 삐이걱하고 열리는 서양의
여닫이문에 비하여 소리조차 촌스럽게 들려온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가 마감될 즈음 자고 일어나면 하나둘 사라지는 후진집 (한옥)에 대한 미련은 아무도 갖고싶지 않게 되었고 한옥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마저 좋은 추억을 슬그머니 지워버리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다시 우리집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절대로 마당에다가 물건을 놓아 두는 법이 없다. 우리와 17년째 사시는 아주머니 또한 마당에서 일하는 것은 일년에 한두번 가을 고추를 멍석에 펴서 널어 말릴 때 뿐이다. 사실 마당은 늘 비어있다. 비어있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한옥에 살게되면 누구나 생활속에서 체득하게 된다
고 나는 믿는다.
눈이오면 아이들이 마당에 쌓인 눈위에 발자국을 내고 싶기도 하련마는 며칠이 지나가도 눈이 녹아내릴 때까지 마당에 쌓인 눈을 흐뜨러 뜨리는 일이 없다. 한옥의 마당은 채와 채가 저만큼 떨어져 서로를 보는 관계항 속에 있다. 그 사이에 늘 고요함이 깃들어 삶을 고양시키고 일상속에 생각하는 순간들을 보태는 것이다. 마당의 예 하나만 보더라도 한옥의 지위는 다시 복권되어야 마땅하다.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한옥은 결코 후진집이나 뒤떨어진 생활환경이 아니라 21세기에 어쩌면 우리가 20세기에 강요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서구의 모더니즘이라는 허물같은 옷을 벗고 이 땅과 거리에 다시 갈아 입힐 진정한 우리 주거의 차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능소헌과 청송재는 이러한 가능성을 스스로 실험하여 우리 건축인 들에게 먼저 권유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일들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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